이 말(독신생활)은 미혼을 의미하는 라틴어 캘렙스에서 온 것으로 성직자 편에서 결혼에 대한 조사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도사에 관한 규칙에 관계된다. 로마 가토릭 교회는 성직자가 니케아 회의(325년) 당시까지만 해도 사도들의 교회의 관례와 일치하여(딤전 3;1-12) 자유롭게 결혼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4세기말 경에 영성에 관한 이중적인 표준이 교회 내로 잡입하였다. 당시 교회들들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마19:12)란 예수의 말씀에 주목하였다. 당시 교회들에 있어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란 그의 결론은 자의적인 보다 높은 표준으로서의 독신 생활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바울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인하여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를 더욱 온전히 섬길 수 있으리라고 고린도인들에게 조언하였다(고전7:32-35).
1-3세기의 증가하는 성직자 제도는 특별한 상태를 보다 나은 편으로 간주하였다. 사도교헌(使徒敎憲:400년 경)은 희랍정교회의 교회법의 기초를 이루며, 목사와 감독들에게 성직 수임식 전에 한 결혼만을 허락한다. 트룰로 회의(692년)는 감독은 성직 수임식 기간에 독신 생활을 해야 하거나 자기 아내와 별겨해야만 한다고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규정이 지금도 동방교회에서는 준수되고 있다.
4세기부터 10세기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결혼한 성직 지원자들에게 자신들의 아내와 떨어져 살기를 요구하는 일로부터, 어떤 경우에서는 남편과 아내로서, 다른 경우에서는 단지 정신적인 면에서만 자신들의 배우자와 동거하기를 요구하는 이에 이르기까지 독신생활에 대한 여러 견해가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지지하는 지역 회의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집사, 사제와 감독들의 완전한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전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을 제 4차 라테란 회의(1215년)가 승인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사도적인 자유의 회복을 지지하여 성직자에 대해 강요된 독신 생활을 강력히 거부하였다.
한편,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다.(마 4:18 - 20). 그리고 요 1:44에 의하면 베드로의 고향은 빌립과 마찬가지로 벱세다였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가 벱세다에서 출생하여 결혼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거하면서 어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버나움과 벱세다는 서로 인접해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설사 고향이 가버나움이었다고 하더라도 베세다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에(8:20)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러 거기서 거처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베드로가 결혼하였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마 8:14)
"그의 장모가", 이 말은 베드로가 결혼하였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이다. 훗날 그의 아내는 바울과 베드로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고전 9:5). 그리고 그의 장모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도 함께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베드로의 결혼은 성직자들의 독신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희석(稀釋)시키는 내용(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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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의 독신생활의 역사와 성경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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